[시승기] 스펙터, 전기차가 아닌 롤스로이스다!

신승영 기자 2024-04-15 17:00:27

오랜 기간, 롤스로이스에게 전기차는 유산과도 같은 존재다. 찰스 스튜어트 롤스는 "전기차는 완벽한 무소음인 동시에 깨끗하다. 냄새도 진동도 발생하지 않는다"며 미래를 예견했고, 프레드릭 헨리 로이스 역시 발전기와 전기모터 등을 제작한 전기공학자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두 창업자에게 전기차는 또 하나의 지향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구현한 유령과도 같은 압도적인 정숙성과 매끄럽고 우아한 주행성(effortless), 그리고 특유의 떠있는 듯한 승차감(waftability) 등은 전기차의 특성에 보다 가깝기 때문이다.

120여 년의 시간을 넘어, 롤스로이스가 선보이는 럭셔리 일렉트릭 슈퍼 쿠페 '스펙터'를 만나봤다.

스펙터의 첫인상은 위압적이다. 전면을 가득 채운 판테온 그릴을 비롯해 떡 벌어진 어깨와 감출 수 없는 카리스마가 넘친다. 거대한 23인치 휠과 유려하면서도 감각적인 측면 실루엣, 그리고 단정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후면부 등은 남다른 존재감을 발산한다. 화려한 맞춤 예복을 입은 프로 보디빌더 같다. 

실제로 5.5m에 달하는 전장과 2m가 넘는 전폭을 바탕으로, 일견 2도어 쿠페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고스트 기반으로 제작됐던 레이스·던이 아닌 팬텀 쿠페를 계승한다는 설명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손잡이를 가볍게 당기면, 브랜드 역사상 가장 긴 1.5m의 에포트리스 코치 도어가 느긋하고 우아하게 열린다. 2+2 시트 구조로, 굳이 앞좌석을 당기고 뒷좌석에 올랐다.

시트는 부드럽지만 몸을 탄력적으로 지지한다. 힘을 빼고 밀착하면 어느새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그렇게 반쯤 감긴 눈은 터널을 지날 때 자연스럽게 번쩍 떠진다. 도어 안쪽과 헤드라이너, 그리고 조수석 대시보드의 네임 플레이트까지 곳곳에 자리한 스타라이트의 별빛이 맑고 깊은 밤하늘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사실 2도어 쿠페의 뒷좌석은 사람보다 가벼운 짐을 두기 위한 공간이다. 작은 체구의 어린아이가 타더라도 답답한 시야와 불편한 승차감으로 인해 장거리 운행에는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스펙터는 다르다. 승하차시 불편함만 제외한다면, 175cm 성인에게도 뒷좌석은 충분하다. 헤드룸은 살짝 좁지만, 무릎 및 다리 공간이 여유롭다. 복잡한 도심에서 고속도로를 거쳐 굽이진 교외 산길까지 대부분의 구간에서 안락하고 편안한 승차감을 구현했다. 특히 짧은 방지턱이나 깊은 포트홀은 물론, 긴 도로 포장 공사 구간과 비포장길을 지날 때면 자연스레 매직 카펫 라이드란 표현을 떠올릴 수 있다. 


물론, 이 같은 감상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 2도어 쿠페답지 않게 뒷좌석에 타더라도 장거리 운행을 할 수 있는 그랜드 투어러의 성향을 가졌을 뿐, 스펙터는 엄연히 운전자 중심의 오너드리븐카다.

운전석으로 자리를 옮긴다. 호사스러운 가죽과 원목 마감 속에서 간간이 느껴지는 묵직한 금속 소재는 품격을 한층 더 높여준다. 다만, 일부 시승차량의 경우 클래식한 인테리어 구성과 어울리지 않는 컬러를 택했다. 지나치게 화려한 색상은 쉽게 질리는 법. 개성을 표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각 소재와 구성에 걸맞은 색감이 필요하다.


운전대를 잡고 가속페달을 밟는다. 3톤(공차중량 2945kg)에 달하는 무게가 쉽게 와닿지 않는다. 멀미가 나거나 목이 젖혀질 정도로 폭력적인 가속력은 아니다. 오히려 매 순간이 부드럽지만, 그럼에도 의식하지 않으면 어느새 제한속도를 훌쩍 넘긴다.

여느 전기차가 아닌 묵직하고 탄력적인 매력의 롤스로이스다. V12 엔진의 여유롭고 넉넉한 주행 질감을 고스란히 구현했다.

직선이 아닌 연속된 코너나 급작스러운 방향 및 속도 전환에는 롤링과 피칭이 다소 큰 편이다. 다만, 첫 움직임에서만 크게 출렁인 후 금세 안정적으로 자세를 바로 잡아 불안하지는 않다.

시프트 레버의 B 버튼을 누르면 비로소 전기차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가속페달을 떼면 회생 제동이 강하게 걸려 원 페달 드라이빙이 가능하다. 하지만 어딘가 거친 느낌이다. 얼른 B 버튼을 다시 누르게 된다. 

102kWh의 대용량 배터리에도 불구하고 1회 충전 주행가능거리는 383km에 불과하다. 에너지 효율과 실주행가능거리는 표시된 숫자보다 높지만, 어딘가 아쉽다. 육중한 무게를 견디며 롤스로이스 특유의 주행질감을 고스란히 구현한 대가다.

스펙터는 전동화 파워트레인을 비롯해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롤스로이스답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화려하지만 편안하고, 부드럽지만 엄숙하다. 제품을 넘어 충분히 아름답고 훌륭한 작품이다. 다만, 두 창업자들이 꿈꾸던 차인지는 모르겠다. 새로운 시대, 롤스로이스가 말하는 '시대를 넘어서는 비전'은 찾기가 쉽지 않다.

신승영 sy@autocast.kr
    안녕하세요. 신승영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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